도암종택의 하루! 내일도 행복할 생각입니다.
국가 민속 문화재 제 181호인 도암종택(의성 김씨 율리 종택)은 새로 지어진 안동역에서 풍산방향으로 송야교를 건너 좌측 마을로 들어서면 누렇게 익어가는 벼이삭의 황금빛 물결에 눈부심을 느낄 찰라 깔끔하게 정돈된 앞마당에 잔디가 깔리고 자연석 축대위에 우뚝 솟은듯한 고택이 우릴 반겨준다.
인조 8년(1630년)에 세워진 조선시대의 학자 도암 김후(金煦)의 종택으로 그의 장인 관풍당(觀風堂) 권제가(權際可)가 지어준 고택이다. 도암 김후는 의성 김씨 23대손으로 청계 김진의 고손이며 운천 김용의 손자이기도 하다.
도암 선생은 효우(孝友)(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를 통틀어 말함)로 이름이 높았다.선생은 시문이 간고(簡古)(간단하고 예스럽다)하여 사우(士友)들로부터 추증을 받았다. 병자호란 이후에는'춘추(春秋)의리가 없어졌으니 다시 세상에 나가 무엇하리오'하고 안동부 서쪽 청성산 아래 낙동강변에 터를 잡고 은둔하였다고 하니 그곳이 바로 이 율리이다. 옛 지명이 율리인 까닭은 이곳에 밤나무가 많아서 밤나무 율자를 써서 율리라고 하였다
밤은 제사 때 올리는 과일 중 대추 다음이었을 정도로 제물(祭物)로 중히 여겼다. 이유는 밤송이 안에 보통 밤알이 세 개씩 들어 있는데, 후손들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대표되는3정승을 한 집안에서 나란히 배출시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밤이 싹틀 때 껍질은 땅속에 남겨두고 싹만 올라오는데, 껍질은 땅속에서 오랫동안 썩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다. 이런 밤의 특성 때문에 자기를 낳아 준 부모의 은덕을 잊지 않는 나무로 보았다.
오래 보존해야 하는 신주를 단단한 밤나무로 만든 것도 조상에 대한 공경의 태도다. 밤나무가 많아 율리라 불렸던 이곳에 현재는 밤나무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일제 강점기 안동에서 독립운동가가 특히나 많이 배출되었던 의성김씨문중의 맥을 끊고자 일제가 서울가는 철도를 건설하면서 학봉 김성일 묘소을 관통하려는걸 여론에 밀려 실패하자 같은 문중의 율리종택 밤나무를 철도 침목으로 사용한다는 구실로 다 베어 냈는데 그중 율리종택 사당 옆에 있던 가장 오래된 밤나무을 베고나니 사당이 이유 없이 무너지고 더 몇일 뒤에는 불이 나서 사당이 없어졌다고 한다.
율리종택 가옥의 형태는"ㄇ"형의 안채 부분과"一"자형의 사랑채 및 대문간·외양간 등으로 구성된 앞채가 결합되어"ㅁ"자 형을 이루고 있다.
앞채는 대문간에서 왼쪽3칸은 사랑채 부분으로 방2칸에 이어 마루방1칸이 튀어나와 왼쪽 날개를 형성하며, 오른쪽에는 외양간1칸에 이어, 온돌방이 있어 오른쪽 날개를 이룬다. 안채는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윗쪽부터 도장방과 사랑방이, 오른쪽에는 안방과 접해 있는2칸의 부엌이 있다. 중수하는 과정에서 형태가 조금 변형된 듯한 사랑채를 제외하고 원형이 잘 보존된 안채는 400년전 조선중기 건축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더불어 자연석 축대 부드러운 곡선의 출입문 문지방 안마당에서 올려다본 파란 ㅁ자 하늘.
어느 것 하나 고풍스럽지 않은 것이 없으니 아름다운 이 가을 우리 모두 율리고택의 아름다움에 빠지러 떠나보자.